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문단 편집) === [[베네치아]]에 정착 === 1612년 음악 애호가 빈첸초 1세 곤차가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 4세 곤차가]](Francesco IV Gonzaga)가 즉위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아버지와 달리 음악에 큰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가 예술에 투자한다고 많은 돈을 낭비한 탓에 즉위 당시에 상당한 재정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즉위하자마자 몬테베르디를 비롯한 궁정 음악가들을 대거 해고했는데, 22년이나 가문에 봉사한 몬테베르디에게 두둑한 위로금이나 퇴직금은 고사하고 여비수준도 안되는 푼돈만 주고 내쫓았다. 갑자기 직장을 잃은 그는 거의 1년 가까이 일정한 수입이 없이 악보를 팔거나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만토바에서 구직활동을 해야 했다. 다행히 이듬해인 1613년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 대성당]]에서 자신들의 성가대와 연주자들의 기강을 잡고 능력을 향상시켜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성당의 전임 악장이었던 줄리오 마르티넹고(Giulio Cesare Martinengo)는 몸이 약해서 제대로 교육과 연주활동을 하지 못했으며 재정운영도 방만하게 한데다 횡령까지 저질렀기 때문에 성가대와 연주자들의 기강이나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당시 베네치아에서는 몬테베르디의 명성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성당 관계자들은 후임 악장으로 당시 실직상태인 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드디어 병약한 마르티넹고가 저 세상으로 가자 이구동성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많은 기대를 받고 후임 악장으로 부임한 몬테베르디는 기대치에 걸맞게 충실하게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이에 성 마르코 성당 소속 음악가들의 음악수준은 금세 몇단계 뛰어 올랐다. 몬테베르디 입장에서도 성 마르코 성당 악장직은 만토바 시절보다 훨씬 급여가 높고 제때 지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인 취급을 받던 만토바와 달리 1급의 음악가로 존경받았기 때문에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이 악장직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새로운 직장에서 정신적, 경제적 안정을 찾은 몬테베르디는 베네치아에서 직업에 걸맞게 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하였다. 또한 그를 내쫓은 만토바에서 주기적으로 오페라를 작곡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으며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발레음악이나 행사 음악등의 의뢰를 받았다.[* 이 시기에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후술하다시피 모두 실전되었고 다른 작품들도 대부분 전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이 시기의 음악으로 발레극 (티르시와 클로리 Tirsi et Clori, 1616)와 소(小) 오라토리오 탄크레디와 클로린다의 싸움(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t Clorinda,1624) 두 작품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두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감안했을 때 이 시기 작품들이 유실되어버린 것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한동안 중단되었던 마드리갈집 출판도 재개되어서 세속 마드리갈 6집(1614), 7집(1619)이 출판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